CIA의 레짐체인지 성공 사례.

냉전시대, 더 정확히 말하면 1947년부터 1989년까지 CIA는 총 크고 작은 72번의 레짐체인지(정권 뒤집어엎기)를 행했다.

물론 앞으로의 연구에 의해 더 밝혀질 수도 있다. CIA가 부인하고 있는 쿠데타 사례도 꽤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주요 레임체인지 사례들만 설명하겠다.




1953 이란


 

모하메드 모사데크는 석유 국유화를 내걸고 외국 자본들을 축출했다. 이것은 외국 투자를 배척한 최초의 사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사데크의 예상과 달리 이란은 오히려 더 가난해졌다. 우선 외국 자본이 빠져나가면서 투자도 덩달아 빠져나갔고, 석유 분야에서 일하던 숙련된 고급 인력들도 잃었다. 국내 민심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모사데크는 소련의 지원을 받아 위기를 타개하려고 했다. 모사데크는 스스로를 공산주의자가 아닌 민족주의자라 불렀으나 소련과 손을 잡으면서 더욱 민심을 잃었다.


위기 의식이 높아지던 이란 군부에 CIA는 팔레비 국왕이라는 새로운 지도자를 제시했다. 결국 친 팔레비 쿠데타가 발발하여 모사데크는 체포되어 법정에 세워졌다. 그는 3년의 징역, 그리고 가택연금을 선고받았다.





1954 과테말라

 

유럽 이민자의 후손이라서 백인의 외모를 한 이 사람은 과테말라의 비운의 대통령 자코보 아르벤츠이다.

그는 과테말라의 만성적인 빈부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토지 개혁을 실시했는데 개혁이 워낙 급진적이어서 공산주의자로 낙인 찍혔다.

게다가 그는 대기업들을 싫어했는데 미국의 과일 기업에도 규제를 가했다.


과테말라를 자신들의 뒷뜰로 여기는 미국은 아르벤츠를 가만 냅두지 않았다. 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 장군과 손을 잡은 CIA는 쿠데타를 일으켜 아르벤츠를 망명으로 몰아넣었다. 아르마스 대통령은 지극히 잔인한 인물이었고 미국 기업의 이익을 위해 자국민들을 학대할 정도로 노골적인 친미주의자라서 라틴아메리카에서의 미국의 입지를 크게 약화시키는 원인을 제공한 인물이다. 체 게바라는 과테말라 여행 중에 아르마스 대통령의 집권을 목격한 사람이다. 게바라는 극렬한 반미주의자가 되었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아르마스 대통령은 1957년 좌파 성향의 청년에게 암살당했다. 

총기를 휴대하고 거리를 거닐던 위풍당당한 아르마스.

 

1960년 콩고

 

 

파트리스 루뭄바는 한국에서도 유명하다. 벨기에의 식민지였던 콩고 독립운동 지도자였던 선거를 통해 콩고의 첫 수상이 되었다. 그러나 김구처럼 루뭄바도 이상적 좌파 성향이 강했다. 루뭄바는 기득권층이던 벨기에인들과 벨기에인들에게 협력하던 부족들을 차별했는데 이것이 민심의 동요를 불렀다.


루뭄바는 미국 뿐만 아니라 소련에게도 지원을 요청했다. 벨기에에 적대적이라는 점과 소련에게도 지원을 요청했다는 점 때문에 미국과 루뭄바 사이가 미모해졌다. 그 틈을 타 루뭄바의 측근이었던 모부투 세코가 미국과 접촉하여 쿠데타를 준비했다.


쿠데타는 성공했고 루뭄바는 그에게 탄압받던 친 벨기에 부족들에게 체포되었다. 루뭄바는 결국 총살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모부투 세코는 독재자가 되어 부정축재로 악명을 떨치게 된다.

 

1961년 도미니카 공화국

 

도미니카의 독재자 라파엘 트루히요는 처음에는 친미노선이었으나 점차로 반미노선을 걷게 된다. 그 중에서도 미국을 엿먹이기 위해 공산주의자들을 지원한다는 정보가 CIA에 입수되면서 CIA는 트루히요 암살을 결심한다. 마침 트루히요는 워낙 가혹한 독재를 했기에 정적들이 많았다.

결국 CIA의 지원을 받은 군부에서 트루히요를 반대하던 후안 토마스 장군이 주도한 암살 시도가 벌어졌고 결국 트루히요는 사망했다.


그러나 트루히요의 아들 람피스 트루히요가 권력을 이어받아 결국 암살대의 쿠데타는 실패하고 만다. CIA는 직접 개입하여 람피스 트루히요에게 망명을 설득했고 결국 트루히요 일가는 스페인으로 망명했다. 


 

1963년 남베트남


미국은 남베트남 대통령으로 고 딘 디엠을 발탁했지만 그 인사는 큰 실패였다.

디엠이 서구식 교육을 받은 카톨릭 신자라서 발탁한 것이지만 디엠은 불교도들을 탄압했고 그 결과 남베트남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Rage Against the Machine의 앨범 커버로도 유명한 이 분신자살 사진은 디엠 시절의 광경이다.


 

 

 

 

 


게다가 디엠의 일족이 권력을 독점하여 부패가 극심해지자 미국조차도 디엠을 계속 내세울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디엠이 순순히 미국 말을 들을 리 없다고 판단한 CIA는 그냥 쿠데타를 계획하여 디엠을 날려버린다.

디엠과 그의 일족은 암살당했고 남베트남의 대통령 자리는 덩치가 커서 Big Minh으로 불리던 두옹 반 민이 이어받았다.

1964 볼리비아


 

파스 에스텐소로는 민간인이었고 경력이 오랜 정치인이었지만 당시 볼리비아는 군부가 지나치게 정치에 개입하려고 했다. 특히 군부는 우파와 좌파로 나뉘어서 서로 세력다툼을 벌이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군부가 부패하여 게릴라들에게 무기를 팔다 보니 볼리비아는 쿠바처럼 좌익 게릴라들이 산악 지형을 이용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치안이 좋지 않았기에 에스텐소로 대통령은 군부 출신의 레네 바리엔토스 장군을 부통령으로 임명한다. 하지만 바리엔토스는 오히려 쿠데타를 일으켜 에스텐소로를 축출했다.


CIA는 문약한 에스텐소로로는 좌익 게릴라들을 진압할 수 없다고 보고 군부 출신의 바리엔토스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바리엔토스는 빨갱이를 죽이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겠다는 반공주의자였다. 그는 볼리비아 군대가 경험이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볼리비아 군대에게 게릴라 전투를 가르치기 위해 CIA로부터 교관을 초빙해온다.

 


그의 이름은 클라우스 발비(Klaus Barbie). 그는 나치독일 장교였다. 프랑스 리옹에서 레지스탕스들을 잡아죽이던 게릴라 특수전 장교였다.

 

 

레네 바리엔토스 대통령이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던 좌파 게릴라는 체 게바라가 이끄는 게릴라였다.

그리고 클라우스 발비가 훈련시킨 볼리비아 군대는 체 게바라의 게릴라를 고립시켜 나간다.

그리고 결국 바리엔토스 정권은 좌좀들의 영웅 체 게바라를 죽인다.

게릴라를 성공적으로 진압한 바리엔토스는 냉혹한 독재자가 되었다. 특히 처우 개선을 요구하던 광부들을 탄광에 몰아넣고 학살한 일로 그는 악명을 떨쳤다. 클라우스 발비는 프랑스 정보부에 의해 꼬리가 밟혀 결국 프랑스 재판에 회부되었다. 바리엔토스 대통령은 헬리콥터 사고로 1969년 사망했다. 그러나 볼리비아의 혼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1966년 가나

독립운동 지도자 출신의 (타이거우즈 닮은) 콰메 은크루메는 미국에서 공부했으나 성향은 상당히 공산주의 쪽이었다. 그는 미국과 소련의 영향을 받지 않는 아시아-아프리카의 새로운 노선을 제안했는데 그의 주장에 동조한 나라들이 베트남과 중국 등, 공산주의 국가들이었다. 결국 CIA로부터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힌 은크루메가 중국을 방문하는 동안, CIA의 지원을 받은 군부와 경찰이 단결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결국 은크루메는 기니로 망명했다. 군부 출신이면서도 경제 각료로 활약하던 조셉 앙크라가 대통령직에 올랐다.








1971 볼리비아

바리엔토스 대통령이 죽은 이후의 이야기이다.

볼리비아 정치는 매우 특이하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군부는 우파 성향을 보이는데 볼리비아 군대는 좌우로 나뉘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70년 볼리비아 군부는 좌파와 우파로 나뉘어 내전을 벌였다. 이 때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으나 나약했던 대통령 알프레도 오반도는 갈수록 사태가 심각해지자 결국 망명을 선택해버렸다. 오반도의 측근이자 좌파 성향이 강했던 후안 호세 토레스(콧수염아저씨)는 대통령직을 인수했다. 즉, 그는 장군이면서도 쿠데타로 집권하지 않은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다.

 

토레스는 뛰어난 군사지도자였고 결국 13개월에 걸친 우파 군부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성공했다. 토레스는 노조와 공존을 모색하려 했다. 그러나 노조는 오히려 정부가 나약할 때 더 받아내기 위해 파업을 벌이며 토레스의 지도력을 약화시켰다.


이 떄 석유의 국유화를 꾀하던 토레스를 불안하게 보던 CIA는 결국 토레스를 몰아낼 계획에 나섰다. 군부의 우파 성향 장군 우고 반세르를 발탁했다. 반세르는 토레스의 진압을 피해 살아남은 장군이었는데 지지자가 많아 숙청을 피할 수 있었다. 실패한 쿠데타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CIA의 자금 지원을 받아 또다시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번에는 성공했다. 토레스는 아르헨티나로 망명을 떠났다. 


CIA는 토레스를 위험인물로 보았다. 결국 그는 1976년 암살당했다. 토레스의 암살은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이 CIA의 사주를 받아 실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고 반세르는 CIA에게 간택받은 독재자로 집권했으나 통치능력은 별로였다. 결국 미국의 신임을 잃고 대선에서 패배하여 권력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반세르는 퇴임 전에 정당을 만들어 정치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는 고향 산타크루스 델라시에라 지역의 유지였기 때문에 지지기반이 늘 있었다. 그리고 그는 1997년에 대선에서 승리한다. 쿠데타로 집권한 인물이 퇴임 후에 민정선거에서 다시 승리하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다.


그러나 반세르 대통령은 2002년 폐암으로 죽는다. (부시 행정부의 국방장관 콜린 파월과 악수하는 반세르)

 

1973년 칠레

 


CIA의 정치 공작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공작이다.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CIA가 벌인 공작이다.

CIA는 먼저 운송노조를 매수하여 파업을 일으키게 했는데 아옌데 정권이 이를 강력 진압하면서 노조와 아옌데의 사이가 틀어졌다.

그 다음 경제 제재로 칠레를 압박하여 민중시위가 일어나도록 했다.

마지막에 CIA가 발탁한 인물인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을 지원하여 쿠데타를 일으키게 했다.

아옌데는 대통령궁에서 저항하다가 자살했다.

 

 


1979 아프가니스탄

공산주의자 누르 무하메드 타라키가 쿠데타로 권력을 잡자 미국은 가만 있을 수 없었다. 반드시 아프가니스탄을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오퍼레이션 사이클론을 진행시킨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자체에 대해 잘 몰랐다. CIA는 그저 영어를 할 줄 아는 놈이면 지원했다는 조롱이 있을 정도로 아프가니스탄 내부의 복잡한 정치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물량공세만 퍼부었던 것이다. 그때 CIA의 길잡이 역할을 했던 나라가 바로 파키스탄이었다. 파키스탄은 당연히 자기들과 친한 이슬람 근본주의자 세력을 지원하도록 미국을 부추겼다.


미국은 공산주의자 타라키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소련이 직접 침공했고 무자헤딘 세력을 지원하다가 결국 탈레반에게 길을 열어준 꼴이 되고말았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실수로 인해 미국은 현지 사정을 직접 파악해야 할 필요성을 배웠다.


타라키(가운데)와 브레주네프(오른쪽)

종교를 부인하는 공산주의자답게 이슬람교도들을 집단학살한 일로 유명하다.

 

 

타라키를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하피줄라 아민.

타라키 이상으로 잔인한 인물로 CIA에서조차 아민에 대해 psychopath라고 썼을 정도.

(이상한 일은 KGB는 아민이 CIA 편이라 그러고 CIA는 아민이 KGB 편이었다고 주장했다는 점. 즉, 왕따)

결국 소련의 직접 침공으로 몰락한다. 소련군에게 암살당함.

 

1980 앙골라

아프리카에서 보기 드물게 포르투칼의 식민지였던 앙골라. 1980년대 앙골라는 대표적인 대리전쟁(proxy war)의 현장이었다. 앙골라 자유를 위한 민중운동(Popular Movement for the Liberation of Angola: MPLA)은 소련의 지원을 받고 있었고 앙골라의 완전독립을 위한 국민연합(National Union for the Total Independence of Angola: UNITA)은 미국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세력은 12년에 걸친 내전을 벌였다.


MPLA는 포르투칼 독립에 가장 지분이 큰 무장단체였다. 그런데 이 조직은 소련의 지원을 받다보니 공산주의 성향이 강했다. 앙골라는 쿠바, 리비아 등의 지원까지 받으며 아프리카의 반미세력을 육성하는 캠프 역할을 하게 되었다.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레이건 대통령은 앙골라를 손보기로 결심하고 공산주의에 불만을 가진 세력들을 모아 UNITA를 조직하도록 했다.


UNITA의 지도자는 주나스 사빔비였다. 뛰어난 군사 지도자였으며 반공정신이 강해 레이건이 매우 아꼈던 인물이다. 용맹이 매우 뛰어난 게릴라로서 소련과 쿠바 게릴라들의 포위망을 뚫고 도망치면서 앙골라에서는 살아있는 전설로 통하던 전사였다. (앙골라에서는 인기가 아직도 높아서 콜오브듀티가 그를 악역으로 묘사했다고 난리가 나기도 했다)


 


냉전이 종식 되면서 UNITA와 MPLA의 정전 논의가 시작되었으나 사비비가 정전을 거부하면서 내전은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2002년 사비비가 결국 교전 중에 사망하면서 평화 협정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결국 두 군사집단은 정치정당으로 전환하기로 하고 선거를 치뤘다. 대선은 MPLA가 승리했고 UNITA는 야당이 되었다.








1982 차드

 

레이건 행정부 초기의 대표적인 레짐 체인지. 1980년대 아프리카는 반미 성향이 강했다. 그 중에서도 아프리카의 맹주를 자처하는 리비아는 큰 골칫덩어리였다.

카다피는 아프리카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반미노선을 넓혀가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중앙아프리카의 나라 차드의 구쿠니 웨데이 대통령이 카다피에게 접근한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당시 대통령은 반미주의자들에게 지옥을 보여주는 일을 좋아하는 레이건이었다. 그런 판에 카다피와 친하게 지내려고 하다니 웨데이는 자기 관에 못질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레이건은 웨데이를 몰아낸 후의 차드를 생각하다가 차드를 다스릴 사람으로 웨데이에게 맞서던 군벌 이센 아브레를 지목했다. 아브레는 겉으로는 야당지도자지만 동시에 군대를 이끌고 있는 군벌이기도 했다. 그가 레이건의 간택을 받은 이유는 프랑스와 거래하면서 반공성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CIA의 지원을 받은 아브레는 쿠데타에 성공했고 웨데이는 알제리아로 도망쳤다. 2007년 차드에 귀국할 때까지 웨데이는 길고 긴 망명생활을 하게 된다.

아브레는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무시무시한 철권통치를 자행했다. 그러다가 측근이었던 이드리스 데비 장군과 반목하게 되었고 결국 1990년 데비의 쿠데타에 의해 축출되었다. 레이건의 뒤를 이은 부시 행정부는 데비가 반공정신이 투철하다 하여 그를 인정했다. 


이드리스 데비는 1990년 집권한 이래 아직까지도 차드의 대통령이다. 아프리카 독재자 치고 데비는 온건한 편이며 굳건한 친미 노선을 지키고 있다. 미국의 각 행정부하고도 잘 지내는 외교술로 아프리카의 중요한 미국 동맹국으로서의 지위를 지키고 있다.

 

다음에는 미국의 레짐 체인지 실패 사례를 보고 왜 실패했나 분석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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